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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Biennale

부산비엔날레는 1981년 지역 작가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비엔날레인 부산청년비엔날레와 1987년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자연환경미술제인 부산국제바다미술제, 그리고 1991년의 부산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이 1998년에 통합되어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PICAF)로 출범한 이후, 격년제 국제현대미술전시로 개최되고 있습니다.

부산비엔날레는 정치적인 논리 혹은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부산 지역미술인들의 순수한 의지와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비엔날레와는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의 미술인들이 보여 주었던 부산문화에 대한 지역적 고민과 실험성 등은 오늘날까지도 부산비엔날레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대미술전, 조각심포지엄, 바다미술제의 3가지 행사가 합쳐진 경우는 부산비엔날레가 전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또한 행사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 네트워크는 국내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확장시킴과 동시에 글로벌한 문화적 소통으로서 지역문화 발전을 이끄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태동으로부터 39년째에 접어든 부산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대중화, 즉 일상 속의 예술 실현을 목표로 하여 실험적인 현대미술 교류의 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2 한길

조회 15,605

관리자 2013-03-25 10:18

작가노원희
본전시

 
한길
페인팅들
노원희는 1970년대 후반 또는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새로운 구상화(‘신구상화’라고도 함)의 언어로 많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출현 이후, 한국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을 형성했던 주류 엘리트주의와 그들의 비정치성을 부정한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이고도 실존적인 삶의 고민을 정치화하는 리얼리즘 미학을 실험하였다.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이 태동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학적 투쟁에 나섰던 “현실과 발언”의 작가로서, 그는 주로 대중매체의 잔상 이미지나 한국적 상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과 반대로 생경하다 못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강렬한 작품들도 있었는데, 익히 알려진 것처럼 1980년대 초반의 길거리를 그린 그림이 그런 것이다. “배움의 정원”에서는 그의 작은 회고전을 기획했다. 이 전시에서는 예전 것과 더불어 최근에 제작된 작은 회화 연작을 보여준다. 신작들은 광고 이미지나 신문 기사 같은 대중적이면서도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그는 무심하고 거칠게, 그러면서도 직설적인 태도로 그림을 그렸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접한 후, 그는 진부하거나 불합리한 대중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즉 어떤 문제를 일부러 부자연스럽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는 냉소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작품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동시에 유머러스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대상을 바라볼 때, 그리고 작가로서 회화를 연구하는 태도나 의식에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노원희의 모든 종류의 작품은 진실성에 대한 미술적 발언임은 물론이고, 소비문화의 값비싼 상품을 기반으로 이뤄진 대중적 신화에 대한 어떤 시발점으로 작동한다.
노원희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은 몽타주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집의 이미지와 어느 부부 이미지를 병치시킨 것이 있다. 이 그림 속 남자는 검정색 양복을, 여자는 한복으로 말끔하게 차려 입었다. 두 인물은 여러 색으로 차분하면서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오래된 집은 단색의 스케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빛이 바랜 듯 어둑한 캔버스 때문에 이 두 인물은 말끔히 차려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누추해 보인다. 사실 이 두 인물이 그려진 방식에서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그러니까 노동집약적 그리기로 그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것인데, 바로 그 결과로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검은 양복의 남자가 아내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언뜻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의 땀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도 같으니까. 물론 이 부부를 보면서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가질 수 없는 집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림 속의 저 집은 유령처럼 그저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작가는 그 부부를 집과 잘 어울려 보이게 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몽타주는 단순히 이 화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캔버스 위에서 잔잔하게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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