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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Biennale

부산비엔날레는 1981년 지역 작가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비엔날레인 부산청년비엔날레와 1987년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자연환경미술제인 부산국제바다미술제, 그리고 1991년의 부산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이 1998년에 통합되어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PICAF)로 출범한 이후, 격년제 국제현대미술전시로 개최되고 있습니다.

부산비엔날레는 정치적인 논리 혹은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부산 지역미술인들의 순수한 의지와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비엔날레와는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의 미술인들이 보여 주었던 부산문화에 대한 지역적 고민과 실험성 등은 오늘날까지도 부산비엔날레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대미술전, 조각심포지엄, 바다미술제의 3가지 행사가 합쳐진 경우는 부산비엔날레가 전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또한 행사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 네트워크는 국내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확장시킴과 동시에 글로벌한 문화적 소통으로서 지역문화 발전을 이끄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태동으로부터 39년째에 접어든 부산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대중화, 즉 일상 속의 예술 실현을 목표로 하여 실험적인 현대미술 교류의 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2 레바 41

조회 13,463

관리자 2013-03-22 13:44

작가아이 웨이웨이
본전시


레바 41 

2008년 5월 12일 중국 사천성을 강타한 대규모 지진으로 6만 명 이상이 죽고 수 백만 명이 집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학생이었다. 이상하게도 근처의 다른 건물들은 약간의 피해만 입었는데, 학교 건물들은 파편더미로 내려 앉아버렸다. 아이 웨이웨이를 포함한 시민활동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지자체 공무원과 건축업자들이 콘크리트 보강을 위해 강철봉 대신 얇은 철사로 대체하여 만든 이른바 ‘두부-빌딩’이 문제였다. 정부에서는 이 사실을 무마하려했다.

아이 웨이웨이는 조사작업의 한 부분으로, 사천성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의 이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건축적 경향 때문에 잔해에서 철봉을 줍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진 때문에 휘어져 부조리적 형상을 취하는 그러한 실제적 캘리그래피는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자연 힘의 맹렬한 영향력과 인간의 탐욕에서 나온 냉소적 방치를 질타한다. 아이 웨이웨이는 자신이 찾은 보강용 철봉을 철공소로 가지고 가서 그것의 복제품 2개를 주문했다. 일종의 레디메이드 사물로서 원래의 보강용 철봉을 전시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별 매력이 없었다. 그런데 새로 만든 두 개의 철봉도 분명 충분하지 않았다. 대충 보기에, 세 개는 있어야 했다. 그럼 네 개는 너무 많을까? 왜 그럴까?

적어도 미니멀리즘 이후, 연속성 개념은 현대미술에서 하나의 어법으로 확립되었다. 어떤 종류의 사물이 복제되더라도, 복제되는 순간 그것은 종종 나름의 질서와 존재 형식을 확립한다.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 웨이웨이는 자신의 예술적 과제를 위해 이 모더니스트 어법을 빌려와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차용이 곧 그것을 고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보강용 철봉의 미적 가치를 고려하는 대신, 아이 웨이웨이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그런 끔찍한 철물을 예술작품으로 보여주는 행위의 얄팍한 부조리이다. 즉, 사천성에서 발견된 것과 그것의 복제품 사이에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이 심연은 모든 관람객의 상상 속에서, 별다른 노력 없이, 재창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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