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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Biennale

부산비엔날레는 1981년 지역 작가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비엔날레인 부산청년비엔날레와 1987년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자연환경미술제인 부산국제바다미술제, 그리고 1991년의 부산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이 1998년에 통합되어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PICAF)로 출범한 이후, 격년제 국제현대미술전시로 개최되고 있습니다.

부산비엔날레는 정치적인 논리 혹은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부산 지역미술인들의 순수한 의지와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비엔날레와는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의 미술인들이 보여 주었던 부산문화에 대한 지역적 고민과 실험성 등은 오늘날까지도 부산비엔날레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대미술전, 조각심포지엄, 바다미술제의 3가지 행사가 합쳐진 경우는 부산비엔날레가 전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또한 행사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 네트워크는 국내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확장시킴과 동시에 글로벌한 문화적 소통으로서 지역문화 발전을 이끄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태동으로부터 39년째에 접어든 부산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대중화, 즉 일상 속의 예술 실현을 목표로 하여 실험적인 현대미술 교류의 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양서협동조합 (차성환)

조회 426

관리자 2022-12-15 15:05

차성환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마항쟁이 일어나기 1  전, 문화의 불모지라 불리던 부산에 특이한 이름의 협동조합이 등장했다. 정식 명칭은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 유신 독재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청년들이 모여 “양서의 판매  이용을 통하여 부산의 지적·문화적 풍토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의 어둡고 병든 곳을 개혁해 감으로써 협동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참다운 인간애가 넘치는 사회를 실현(창립 발기문)하려고 했다.  조합에 재야의 어른들이 참여하여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조합은 온건한 문화 운동을 표방했기에 경찰도 심한 탄압은  했다. 그런데 독재 권력의 정보·문화 통제로 목말라 있던 대학생, 직장인, 주부, 교사  여러 계층의 시민들이 모여들어 조합원이 되고 다양한 작은 모임을 만들어 소통하기 시작했다. 부마항쟁 직전인 1979 9월에는 조합원 수가 500명을 넘었고 재정도 튼튼했다. 부산의 실험은 전국으로 파급되어 마산, 대구, 서울, 광주, 수원, 울산 등에 양서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1979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독재 권력은 부산양서협동조합을 배후 세력으로 몰아가려 했지만 박정희의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1979 11월, 부산양서협동조합은 계엄사의 강압으로 해산되었다. 다른 지역들도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었다. 양서협동조합운동은 좋은 책을 읽자는 문화 운동이었지만 민주화를 지향하는 대중운동이자 조직 운동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