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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부산비엔날레

주제

2004부산비엔날레

隙, Chasm

틈(隙, Chasm)

주제설정배경
2004부산비엔날레가 '틈'을 전시주제로 선정한 데에는 부산비엔날레를 문화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소중한 문화적 처소로 만들어 보자는 의식의 전환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종래의 많은 비엔날레를 짓눌렀던 규모주의를 배제하고, 문화의 정치학을 불러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요구는 당연히 전시주제에 의해서도 충족되지 않으면 안된다. 종래의 전시주제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그것이 전시주제로서 실제로 전시 속으로 침투해서 의미론적 연관성을 확보해내지 못하는 공허한 구호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전시주제가 대부분 거창하고 규모가 큰 수사어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규모주의적 집착은 비엔날레를 규모가 큰 국제전이나 고급미술의 축제로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4부산비엔날레는 고급미술이라고 하는 찬란한 스펙터클(예술작품의 사적 생산)을 무지몽매한 일반 관객에게 선사하는 성스러운 기회이기를 거부한다.

2004부산비엔날레는 문화정치학의 입장에 서서 예술을 문화적 처소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2004부산비엔날레는 부산 혹은 아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혈들을 시각적으로 불러내어 문화적 논평을 가하는 전략적인 기회(문화의 사회적 생산)가 되고자 한다. 따라서 주제의 선정 역시 전시내용과 겉도는 허황된 구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어버릴 필요가 있고, 전시내용을 구현해내는데 기여하는 실질적이고도 환기력이 뛰어난 주제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주제는 단순히 수사학적 형용으로 끝나지 않고 전시내용 속으로 침투해 그것을 육화해 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가부장제적 권위와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이른바 크거나 힘센 주제가 아니라 작으면서도 울림이 오래 가고 우리의 삶에서 솟아나는 주제를 찾아내어야 한다.

기념비와 같이 군림하는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강요하는 큰 주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배제하고 억압할 뿐이며 그들을 계속 미술에 대한 타자로 남아 있게 만든다. 크고 힘센 주제는 마치 우리의 머리를 내려치는 쇠망치와 같아서 의식을 마비시키고 생각의 진전을 방해하며, 전시된 작품들을 의미론적으로 읽어내지 못하게 만든다.
2004부산비엔날레의 주제 '틈'은 이러한 고민 속에서 조탁되어 나왔다. '틈'은 얼마나 작으며 따라서 규모주의에 물든 사람들을 얼마나 크게 실망시키는가. 그러나 '틈'은 공식적이고 제도화된 예술의 내부에 잠복해 있는 불안정성에 미세한 '틈'을 내고 그것이 휘두르는 미적 독재에 균열을 불러일으킨다. '틈'은 그동안 우리의 문화권리가 처해있었던 망각의 밭에 떨어져 문화민주주의의 싹을 틔울 하나의 귀중한 씨앗이다.

의미방향
'틈'은 항상 관계를 전제한다. 이런 의미에서 '틈'은 물체나 실체가 아니라 그런 것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그것들이 엮어내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틈'이 기존의 예술관에다가, 기존의 대규모 비엔날레에다가 틈을 낼 수도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계 때문이다.
부산비엔날레가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도, 2004부산비엔날레가 문화정치학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관계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2004부산비엔날레는 여느 대중문화행사처럼 현란한 이미지의 홍수를 통해 관객에게 값싼 위안과 쾌를 안겨주는 과시적인 공간이 되길 거부한다.
'틈'으로서의, '트라우마'로서의 예술은 그러한 현란한 이미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우리의 일상 속에 이를테면 일종의 정치적 관계를 설정한다. 2004부산비엔날레가 전시하고자 하는 작품이 바로 이러한 것이고 기대하는 것이 바로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들의 비상한 능력이다.
오늘날의 작가는 현실세계를 안내하는 확실한 길잡이가 아니라 차라리 낯선 방향을 향해 떨고 있는 나침반과도 같다. 그러나 2004부산비엔날레는 놀라움과 충격을 통해 부산과 아시아 대륙의 문화적 연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의미고찰
'틈'이라고 하는 주제가 단순한 구호가 아닌 것은, 그것이 2004부산비엔날레를 단순히 당대미술의 국제적인 교류의 장으로 보지 않고, 문화정치학이 실천되고 문화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전략적인 기회로 본다는 기본 전제 위에서 제안되었기 때문이다.
'틈' 이라고 하는 미세한 주제는 시적 환기력이 뛰어나고 의미론적 통풍이 너무나도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해석과 의사소통의 여지가 엄청나게 다양한 큰 주제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가 '틈'의 의미를 고찰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위의 기본전제이다. 문화정치학과 문화민주주의라고 하는 기본전제는 미술을 종래와는 달리 볼 것을, 미술의 위상을 과거와는 다르게 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2004부산비엔날레의 주제 '틈'의 의미 읽기 마저도 일정한 방향으로 정박시키고 있다.

'틈' 은 문화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문화정치학을 실천하는 주제이다. 다시 말해, '틈'은 미술을 이른바 고급예술의 전당에 국한하지 말고 문화의 처소로 옮겨놓을 것을 제안하는 지리심리학적이고도 지리정치학적인 개념이다. '틈'의 의미를 이렇게 읽을 때 우리가 어디에서 '틈'을 찾아낼지, '틈'의 정박지가 어디인지, 다시 말해 '틈'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분명해진다. '틈'의 정박지는 우리의 일상과 정신적 외상이다. 먼저, '틈'은 우리의 일상 속의 '틈'이다. 미술은, 적어도 2004부산비엔날레에서 전시될 미술작품은 있지도 않은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서는 안된다. 2004부산비엔날레는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고 있는 일상의 틈들을 시각적으로 소환해 내고자 한다. 우리가 역사의식 속에,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경험 때문에, 압축 경제성장 때문에 반민주적인 억압정치 때문에 오리엔탈리즘 때문에 자본주의의 유혹적인 스펙터클 때문에 이런 것들이 불가피하게 우리 속에 심어 놓은 전도된 가치관과 왜곡된 자아상 때문에 방치하고, 억압하고 은폐해 버려 결국 무심한 일상으로 덮여 가리워진 것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틈'인 것이다. 우리를 현재의 여기에 있게 만든 '틈'들은 작가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날의 작가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 그는 우리에게 고통이나 기쁨, 모순과 추, 상처와 치유를 안겨준 것들 그러나 이제는 망각되어 일상의 틈 속으로 가라앉은 것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폭로하고 움직이게 한다. 오늘날의 작가는 이를테면 망각된 '틈'에 문화적 코멘트를 가하는 시각적 사상가이자 틈의 공간이 정치적으로 구축되었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정치적 건축가인 셈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직접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억과 의식 속에 남지 못하고 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층위로 좌천된 틈들은 이를테면 분석을 기다리고 있는 증상(Symptoms)과 같은 것이며, 거의 유일하게 실재계를 (순간적이고도 편린적으로, 그러나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와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틈'은 바로 아시아 각국이 혹독하게 겪었던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된 정신적 외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2004부산비엔날레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자국이 겪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시 맥락 속으로 불러내고, 시각화해 우리를 문득 깨우치고, 위의 눈을 정치적으로 뜨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트라우마를 불러내는 작가는 시각의 층위에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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