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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

조회 1,816

관리자 2020-09-03 22:16

1918년 한국 부산 출생

1978년 부산에서 별세

임호, 〈을지로 3 10.5, 연도미상, 종이에 수채, 연필, 20.4×24cm

LIM Ho, Euljiro 3-ga, October 5, Unknown, Pencil on paper, 20.4×24cm

간결한 선과 특유의 드로잉 감각으로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정서를 표현한 임호(본명 임채완)의 작품은 서구의 흔적과 민족주의적 내용이 혼재되었던 근대 미술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 받는다. 임호는 1950-70년대, 20여 년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작가로서 활동했지만 부산 지역의 근대 화단 형성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여러 활동을 통해 부산 미술계의 흐름과 동향을 소개했다. 그는 일본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서양미술을 학습하였고,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몇몇 동료들과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임호는 1947년 결성한경남미술연구회의 창립전(1949)을 통해 부산에서 작품을 발표했고, 서성찬 등의 작가들과 종군화가로도 활동했다. 이 후 1953년 부산에 정착하여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미술계 전반의 다양한 활동을 주도했다. 일례로 부산에 정착한 해에 부산화가 김경, 김영교, 김윤민, 김종식, 서성찬 등과토벽회를 결성했다. 이 시기에 임호는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특질을 반영한 리얼리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는 당시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피난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이질감과 그에 따른 저항의 표현이기도 했다. ‘토벽회는 결성 이듬해 3회의 동인전을 열고 난 후, 임호와 김경의 작품이리얼리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논쟁을 일으켜 해체되었다.

임호는 첫 개인전(1955. 6. 17.-6. 23., 미화당백화점 화랑)을 준비하면서 “회화라는 것은 즉흥적으로나 또는 손끝의 기교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사색과 고뇌와 피저린 고혁에서 비로소 회화 본질의 영성에 이르러질 수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그가 결성했던 ‘토벽회’의 취지문과 유관하다.

1955년 임호는 김봉진, 김종식, 성백주 등과 부산 아포로다방에서 《7월 동인전》을 개최하고, 이 외에혁토사’, ‘흑마등 여러 그룹의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1964년 부산공보관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같은 해 부산시문화상을 수상하며 부산, 일본 등에서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다. 평소 도시의 풍경을 체험하고 관찰한 정황을 본인만의 시선으로 담고자 사생활동을 즐겼던 임호는 1974일요화가회회원들과 밀양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후 고혈압으로 쓰러져 57세의 나이로 작고한다. 지역성과 사실주의를 기저로 민족미술의 원형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임호는 부산 근대 미술의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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